forever, Hero

축구의 신, Lionel Messi 리오넬 메시

Aruarian 2024. 8. 18. 09:44

 축구라는 스포츠가 생긴 이래 펠레 마라도나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선수 FC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이끌며 각종 컵 대회 석권은 물론 개인 공격 포인트 기록을 모조리 갱신하면서 개인 수상까지 싹쓸이 한 리빙 레전드 마지막 남은 숙원이었던 월드컵까지 차지하며 드라마틱한 피날레를 장식한 축구의 신 바로 리오넬 메시입니다. 

 리오넬 메시는 1987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이탈리아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 덕분에 메시는 비교적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마라도나의 나라였던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축구는 생활이었으며 과거 축구선수 출신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메시와 그의 형제들 또한 자연스럽게 축구와 함께 자랐죠 메시 위로는 2형들이 있었는데, 2형 모두 지역 연구팀인 뉴레스 올드보이스 유소년 팀 소속이었고 어린 메시는 5살 때부터 그러한 형들 사이에 끼여서 축구를 하곤 했습니다. 


 형들과 나이 차이도 나고 몸집도 꽤 차이가 났지만 어린 메시는 매번 강한 승부욕으로 축구공을 이리저리 컨트롤하며 형들을 농락했고 이러한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때부터 리오넬 메시의 재능이 비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시는 외할머니 셀리아와 함께 형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우연히 베이비 풋볼리그 운동장을 찾았는데요. 갑자기 경기 도중 선수 1명이 부족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해당 팀의 코치가 급하게 대체선수를 찾기 위해 운동장에 구경 온 아이들을 물색했는데 그때 메시의 외할머니가 자신의 손자를 경기에 투입하라고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하지만 겨우 5살밖에 되지 않았고 또 너무나도 작은 체구를 가진 메시를 보고 코치는 다칠 위험이 있다며 거절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자인 메시를 한번 뛰게 해보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코치는 마지못해 꼬마 리오넬 메시를 대체 선수로 투입하게 되죠. 메시가 투입되고 불과 몇십 분 뒤 운동장에 구경 온 모든 관중들과 선수들은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맙니다. 


 겨우 5살짜리 꼬마 메시가 자기보다 3~4살이나 많은 유소년 선수들을 현란한 드리블로 모두 제끼고 골까지 성공시킨 것입니다. 우연히 대체 선수로 경기를 뛰게 된 메시는 5살짜리 꼬마의 실력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트래핑 탈압박 슈팅 능력을 마음껏 뽐내며 그라운드 위를 종횡무진 누렸습니다. 이 충격적인 경기 이후로 리오날 메시는 천재의 등장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로사리오 지역의 깜짝 스타가 되었고 2년 뒤에는 지역 연고팀인 뉴웰스에 입단하여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뉴웰스 입단 이후 메시의 실력은 더욱 일취월장하여 이미 마라도나의 재림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유망주 반열에 올랐으며 이러한 메시를 보기 위해 유럽의 수많은 명문 구단 스카우터들이 로사리오를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시에게 큰 시련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성장호르몬 결핍 장애 진단이었습니다. 메시가 10살이 되던 무렵 문득 메시의 키가 또래보다 더딘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그의 아버지는 메시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가 성장호르몬 결핍 장애가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조직을 듣게 됩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프로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정도 피지컬에는 도달해야 하는데 메시는 그 수준보다 한참 못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죠. 때문에 메시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매일 피하주사를 맞으며 치료를 병행해야만 했습니다. 매일같이 자신의 허벅지에 크나큰 주사기를 찔러 넣어야 하는 눈물과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프로 선수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린 메시는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아버지 호르헤 메시는 아들의 치료 비용을 감당해야만 하는 큰 걱정을 떠안게 되었죠. 치료를 시작한 처음 2년 동안은 공기업에 다니던 아버지의 의료복지 혜택 덕분에 치료비를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가 찾아오게 되면서 메시를 위한 회사 복지 서비스가 끊기게 되었고 이는 메시를 보유한 뉴웰스 클럽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시의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내 클럽들에게 아들의 치료비 지원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자 어디든 아들의 치료비를 지원해 줄 수 있는 클럽을 찾기 위해 유럽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때 메시 부자의 손을 잡아준 구단이 바로 FC 바르셀로나였습니다. 


 이미 리오넬 메시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FC바르셀로나의 에이전트가 그의 아버지에게 컨택하여 입단 테스트를 권유했고 메시는 곧바로 바르셀로나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해왔듯 완벽한 재능을 선보이며 바르셀로나 클럽 관계자들을 매혹시켰죠 특히 카를레슬 렉사흐 기술 이사는 이 어린 소년을 당장 영입해야 한다며 클럽 회장 및 이사들을 강력하게 설득했지만, 정작 바르셀로나 클럽 내에서는 13세의 어린 외국인 소년을 바로 계약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 측은 메시의 성장호르몬 결핍 장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유망주라도 이 치료 금액을 지원해 주면서까지 투자하는 것이 모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달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메시의 아버지는 확답을 주지 못하는 바르셀로나 측에 더 이상 기다려 기다릴 수 없다며 다른 클럽과 계약하겠다고 통보하는 상황까지 봉착하게 됩니다. 

 이대로라면 엄청난 유망주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불똥이 떨어진 렉사흐는 다시 한번 바르셀로나 회장에게 강력하게 계약을 요청함과 동시에 메시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는 급하게라도 냅킨의 가계약서를 써 주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메시를 있게 한 그 유명한 냅킨 계약서입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리오넬 메시는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인 라마시아에 입단하게 되었고 FC 바르셀로나는 메시의 치료비 전부를 지원해줌과 동시 같이 바르셀로나로 이주할 가족들의 집도 구해 주고 추가로 아버지가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끔 직업까지 보장해 줍니다. 그렇게 리오넬 메시는 자신이 앞으로 역사를 써내려 갈 팀 FC 바르셀로나에 입성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13살의 천재 축구 소년은 내로라하는 유망주들이 다 모인 라마시아에서도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단 3년 만에 모든 유망 광주 시스템을 월반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과정 속에선 FC 바르셀로나라는 명문 구단이 보유한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과 함께 메시의 피를 토하는 노력이 시너지 효과를 보이며 그를 더욱 성장 시켰죠 특히 메시는 성장 결핍 장애 치료까지 병행해야 했기에 구단에서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었고, 메시는 이러한 보살핌 속에 차근차근 몸을 성장 시키며 1군 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 정도의 피지컬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마침내 16살의 나이로 바르셀로나 1군에 입성한 리오넬 메시는 2003년 11월 16일 주제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FC 포르투 와의 친선 경기에 교체 출전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메시는 이듬해인 04/05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1군 훈련에 합류해 시즌을 준비했으며 이때 당시 바르셀로나의 에이스였던 호나우지뉴가 특히 메시를 많이 챙겨줬다고 합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1군 무대 시즌이 시작되고 리오날 메시는 알바세테와의 홈경기에서 사무엘 애투 대신 교체 출전하여 라리가 데뷔골을 터트리는데 이때 데뷔골을 어시스트 해준 선수가 바로 호나우지뉴었습니다. 골을 넣은 뒤 아이처럼 호나우지뉴 등에 업혀 세레머니를 하는 이 장면은 새로운 축구의 신의 탄생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1군 무대에 연착륙한 리오날 메시는 차근차근 기량이 성장하다가 08/09 시즌 과르디올라의 팀 리빌딩 프로젝트의 핵심 선수가 되며 전성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공보다 빠른 선수는 없다.' 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점유율과 빠르고 정확한 패스로 경기를 지배하는 티키타카식의 전술을 주력으로 내세웠는데 그 중심엔 사비 이니에스타 메시와 같은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의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패배 전술에 완벽히 부합하는 정확한 패스로 볼을 배급해주었고 현란한 티키타카의 마무리는 리오날 메시가 매듭지었죠. 08/09 시즌에 바르셀로나는 그야말로 무적의 포스를 보이며 전대미문의 클럽 6관왕을 달성하였고 메시는 이 시즌 이후 첫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월드클래스로 도약합니다. 이 티키타카 전술은 축구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향후 5년간 바르셀로나를 세계 최고의 팀으로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리오넬 메시는 경이로운 득점 기록을 세워가며 자신의 능력을 폭발시켰습니다. 

 09/10 시즌은 컵데이 포함 47골 10/11 시즌은 그보다 더 앞선 55골을 넣으며 득점 기계의 모습을 보였고 이듬해인 11/12시즌에는 아예 리그 50골 시즌 73골이라는 어마어마한 득점을 기록하며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절대자의 위치에 등극하죠. 그렇게 리오넬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 선수 생활에 황금기를 보내게 됩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펩 과르디올라의 티키타카 전술 속에서도 과르디엘로가 떠난 이후 메시 스스로 최고의 공격 조합이라고 칭찬한 MSN (메시-수아레즈-네이마르) 트리오 속에서도 언제나 전술의 중심은 리오넬 메시였습니다. 그리고 2021년 메시는 바르셀로나와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됩니다. 이 당시 FC 바르셀로나가 파산 직전에 놓인 상태였고 메시는 기존 연봉의 30%만 받더라도 남고 싶다는 의견을 표했으나, 스페인 노동법 상 이전 연도 보다 임금이 최소 50% 이상이 되어야 했죠. 비록 재계약 문제로 인해 정들었던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되었지만 메시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동안 축구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커리어는 모두 달성했습니다. 

 


 10번의 리그 우승 7번의 코파 델레이 우승 4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함께 본인은 8번의 리그 득점왕 그리고 7번의 발롱도르를 수상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1번이라도 달성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기록들을 그는 밥 먹듯이 달성했고 LPG 바르셀로나는 리오넬 메시와 함께 축구 역사의 1페이지를 장식하는 영광의 순간을 누렸죠 이런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바로 그토록 바라는 조국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이었습니다. 클럽 커리어에서 모든 것을 이룬 축구의 신 메시였지만 유독 국가대표팀에서는 불운했습니다. 메시의 가장 큰 사랑은 뉴웰스도 ,바르셀로나도 아닌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이다 라고 그 에이전트가 말할 만큼 국가대표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메시에겐 연이은 대표팀에서의 실패가 더욱 뼈아팠을 것입니다. 2005년 헝가리와의 친선 경기 추천하면서 에이 매치 데뷔를 한 리오넬 메시는 교체하자마자 상대 수비수를 가격하는 바람에 1분도 안 돼서 퇴장당하는 강렬한 데뷔전을 가졌는데 이것이 바로 앞으로 펼쳐질 대표팀 잔혹사에 대한 징조였을까요? 슈퍼스타 리오넬 메시는 유독 국가대표팀에서 갖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메시의 첫 월드컵이었던 2006 독일월드컵에서는 8강 독일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탈락 다음 대회였던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는 8강전에서 다시 만난 독일에게 4대0으로 털리며 탈락 그리고 결승까지 오른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에선 또다시 독일에게 연장 결승골을 내주며 통한의 준우승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대회인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아르헨티나는 우승과 인연이 없었는데 2007 2015 2016대회에서는 준우승에 머무르며 번번히 우승 직전에 미끄러졌죠. 특히 이 중에선 2014년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패배한 충격이 컸는지 이 이후로 메시는 약 1년간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이때 월드컵 트로피를 응시하고 있는 메시의 모습은 축구계에서 유명한 사진이죠. 게다가 연이어 2015년 2016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준우승에 머무르는 등 3년 연속 메이저 대회 준우승에 머무르는 수모를 겪자 메시는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중압감에 못 이겨 이제 대표팀에서의 나의 경력은 끝났다라며 대표팀 은퇴 선언을 합니다. 

 메시의 은퇴 선언에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를 달래기 위해 은퇴 번복 캠페인을 벌였고 아르헨티나 대표팀 코치를 비롯한 정치계의 높으신 분들도 메시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 메시는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한번 조국을 위해 뛰기로 결심하죠. 유명한 일화로 중학생 축구 꿈나무가 메시에게 편지를 전달하여 메시가 마음을 돌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고 그 소녀는 첼시 FC의 엔조 페르난데스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2022 카타르 월드컵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한바탕 은퇴 소동을 일으킨 메시와 함께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절치부심하지만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경우의 수로 가까스레 16강에 진출했지만, 하필 우승 후보 프랑스를 만나는 바람에 또다시 16강에서 광탈해 버립니다. 그러나 메시는 월드컵 우승 없이는 은퇴하지 않겠다라며 다음 월드컵인 2012 카타르 월드컵에도 출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메시의 나이와 기량을 고려했을 때 이번 카타르 월드컵이 그의 마지막 월드컵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아진 상황에서 전 세계 축구팬들의 관심은 과연 메시가 월드컵 우승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메시가 대표팀에 몸담은 지 어언 17년. 이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는 메시의 전성기를 보면서 축구선수를 꿈꾼 유망주들이 자라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이들 또한 자신의 우상인 메시와 조국 아르헨티나를 위해 반드시 우승을 이뤄내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쳤습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첫 경기 사우디에 패하면서 이번에 희생양이 되기도 하고 8강 네덜란드전에서는 종료 직전 극전 골을 헌납하며 승부차기까지 가면서 겨우 승리하는 등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를 결승에서 만나 손에 땀을 쥐는 명경기를 연출하며 승부차기 끝에 마침내 우승을 차지합니다. 특히 메시는 결승전에 PK 포함 2골을 넣어 황제의 대관식을 스스로에게 선사했습니다. 이로써 축구의 신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선수가 커리어의 마지막 시기에 월드컵이라는 대역을 이루면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특히 똑같이 마지막 월드컵이었던 라이벌 호날두가 최악의 경계력을 선보이며 눈물의 탄력을 한 것과 대조되어 더욱 드라마틱한 순간이 되었죠. 


 그렇게 리오넬 메시는 클럽 커리어에서도 국가대표 커리어에서도 모두 정점을 찍으며 아르헨티나의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월드컵 우승 이후 메시는 파리 생제르망에서 떠나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팀인 인터 마이애미로 이적하며 슬슬 선수생활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계약 문제로 인해 이적했던 파리 생제르망에서도 메시는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결국 PSG가 원하던 챔스 우승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메시는 또다시 이적을 해야만 했는데요. 이때 메시에게 사우디 클럽인 '알 힐랄'으로부터 호날두에게 제시한 연봉보다 무려 3배에 가까운 금액으로 오퍼가 들어오지만 정작 메시는 친정팀인 바르셀로나로 복귀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바르셀로나로 복귀한다면, 기존 바르셀로나 선수 몇 명이 매각되거나 연봉이 삭감된다는 소식을 들은 메시는 자신으로 인해 기존 선수들에게 피해가 갈 수 없다며 결국 복귀 추진을 접게 되었죠. 대신 배 씨는 데이비드 베컴이 구단주로 있는 인터 마이애미로 이적하겠다고 밝혔는데 천문학적인 연봉이 보장되는 사우디 리그의 오퍼를 거절하고 인터 마이애미 행을 택한 이유는 돈보다는 가족들의 생활과 아이들의 교육 문제 때문이라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선수 말년에 행복 축구 하러 인터 마이애미로 이적한 리오넬 메시는 이적한 지 단 1달 만에 꼴찌팀이었던 인터 마이애미를 리그스컵 우승으로 이끌며 여전히 건재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수식어를 넘어 축구의 신이 직접 강림했다.' 라는 평을 받고 있는 리오넬 메시 흠잡을 데 없는 무결점인 실력과 더불어 드라마틱한 그의 축구 커리어를 보면 정말 이 선수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