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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천재 싱어송라이터 Ed Sheeran 에드 시런

Aruarian 2024. 8. 16. 12:49

오늘은 멜로디만 나와도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남자 영국 천재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의 인생 스토리입니다. 1991년 2월 영국 웨스트 요크셔주 헨리팩스에서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크리스토퍼 시런 우리에게는 줄여서 에드 시런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큐레이터 아버지와 문화홍보가로 활동한 어머니 사이에서 이남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님은 2자녀들이 여가시간을 티비 시청 비디오 게임 등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때문에 에드 시런은 티비 시청이나 게임을 즐기는 또래들과 달리 기타 연주나 피아노 연주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4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지역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죠. 하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그만 불의해 의료사고를 당하고 마는데요. 그는 혈관 기형의 일종인 포트와인 얼룩을 얼굴에 갖고 태어났는데 눈에서 점차 녹내장으로 변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기에 어린 시절 이를 제거하기 위해 얼굴에 레이저 시술을 받았는데 어느 날 그만 의료진이 마취제를 바르는 것을 깜빡 하게 됩니다. 이 해프닝은 에드시런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게 됐고 이로 인해 그는 말을 더듬게 되고 사시현상과 더불어 한쪽 고막에도 문제를 일으키게 되죠. 이후 그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영국인 중 소수가 갖고 있다는 붉은 머리카락 극도로 안 좋은 시력 탓에 착용했던 커다란 안경 사고로 갖게 된 말더듬 현상 청각장애 그리고 사시현상까지 대다수의 또래들과 달라 보이는 에드 시런의 이런 모습에 아이들은 그를 이상한 아이로 여기고 매일매일 괴롭혔습니다. 그는 수업시간에 큰소리로 말하려고 할 때마다 입이 얼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때마다 다른 아이들은 에드 시런을 조롱했죠. 이런 에드 시런에게 유일한 낙은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그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또래들의 조롱과 비아냥을 받아야 했지만, 그가 홀로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만드는 시간만큼은 그런 야유와 비난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에드시런은 이렇게 음악에 집중하며 홀로 위안을 삼았지만 여러 가지 시도했던 언어치료가 계속해서 실패하자 그는 점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평생 말더듬이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며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드 시런의 아버지는 그에게 앨범 하나를 선물하는데 바로 미국 유명 래퍼 에미넴의 한 앨범이었습니다. 

말더듬 현상으로 애를 먹고 있던 9살의 에드 시런에게 속사포처럼 단어를 내뱉는 에미네멜 앱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앨범 단어 하나하나를 다 익히면서 따라하고 또 따라했고 이를 1년 넘게 계속 반복한 결과 말더듬 현상을 극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에드 시런의 아버지는 음악을 향한 아들의 엄청난 열정을 알게 됐고 옆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에드 시런이 극도로 두려워했던 친구들 앞에서의 공연을 꼭 한번 해보라며 계속해서 독려했고 결국 11살 때 에드 시런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학교 콘서트에서 많은 친구들 앞에 나가 첫 공연을 하기도 했었죠. 또한 에드 시런의 아버지는 이 무렵 에드 시런과 함께 아일랜드에 있는 음악가 데미안 나이스의 공연을 보러 가는데 이후 술집에서 데미안 라이스와 아들의 대화를 주선하게 되고 소년 에드 시런은 아일랜드 출신 싱어송라이터와의 대화를 통해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는 싱어송라이터와의 만남 이후 일단 많은 곡을 쓰기 시작합니다. 


불과 13살의 나이에 첫 데뷔 미니앨범 작업에 들어가 14살 첫 미니앨범 더 오렌지룸을 발매하고 15살의 나이에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영상을 업로드 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전문 음악가로서 제대로 경력을 쌓고 싶었던 에드시런은 큰 꿈과 야망을 품고 기타와 옷으로 가득찬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나 16살의 나이에 홀로 런던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는 돈이 없어서 공원이나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밤을 지새고 음식을 살 돈이 없어서 며칠을 굶어가며 다 그만두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었지만 음악은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이자 일종의 소명이었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타를 치고 곡을 쓰고 오디션을 보는 동시에 그 과정 중에 만난 가수들과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하기도 했었고 장소를 옮겨 다니며 1주일에 라이브 공연을 12번이나 해내는 등 엄청난 열정을 불태우며 그렇게 하루하루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약 4년여의 빡빡한 일정으로 공연 작곡 네트워킹을 해온 에드 시런 자신의 나라 영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기 시작한 그는 더욱더 큰 꿈과 야망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과거 홀로 집에서 런던으로 떠났던 것과 같이 이번에도 레코드사 계약이나 머무를 곳 없이 엘에이로 떠나게 되죠. 엘에이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손을 뻗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본인의 음악 보내기 시작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받지 못 했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거절이 쌓여가던 어느 날 엘에이에서 지역 라디오 쇼를 진행하고 있던 한 남자에게 에드시런이 찾아갑니다. 에드 시런이 찾아간 남자는 바로 제이미 폭스였는데요. 갑작스레 자신의 곡을 들고 찾아온 에드시런 그런의 곡을 용기가 가상했는지 그는 일단 한번 들어보게 되죠. 그의 음악을 듣고는 제이미 폭스는 갈 곳 없는 에드시런을 자신의 집 쇼파에 머물게 하고 싶을 만큼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후 에드시런을 자신이 주최하고 있는 행사에 데려가는데 제이미 폭스는 청중들에게 에드 시런을 소개했고 빨간 머리에 우쿨렐레를 가진 한 영국 소년이 무대로 튀어나왔죠 청중들은 뜬금없는 한 소년의 등장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이내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에드시런의 공연에 약 12분 만에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합니다. 까다로운 청중들의 의구심을 탄성과 환호로 뒤바꿔놓은 에드시런 이를 본 제이미 폭스는 그가 성공할 운명임을 확신하게 되죠. 이후 그의 인생은 성공을 향해 무섭도록 돌진하기 시작합니다. 업계 인맥 소개와 대중들에게 에드시런의 인지도를 높여주는 등 제이미 폭스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통해 새로운 싱글 발표와 더불어 추후 애틀랜드 틱 레코드와 함께 작업하여 정규 앨범 1집 플러스를 발매하는데 영국에서 첫 주에만 10만 장이 넘게 팔리고 빌보드 205위 영국 앨범 차트 1위 등 데뷔부터 돌풍을 일으킵니다. 이후 그는 원디렉션 및 다른 아티스트들과 협력을 이어가는 등 영국과 미국에서 무섭게 함께 떠오르는 신예 뮤지션으로 발돋움하게 되죠. 


그리고 그를 반짝 스타가 아닌 1단계 더 큰 스타로 인도해준 미국의 슈퍼스타가 있었는데요. 바로 테일러 스위프트였습니다. 그녀는 호주에서 투어 활동을 하던 중 에드시런의 음악을 라디오로 우연히 접한 뒤 감명을 받게 되고 그에게 연락을 해서 투어에 함께 하지 않겠냐는 요청을 하는데요. 에드 시런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와 함께 6개월간 투어를 했고 2012년 10월 발매된 에브리딩 헤스 체인지드라는 노래를 공동 작곡하고 함께 부르게 됩니다. 이 노래 뮤직비디오는 테일러 스위프트와 에드 시런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요. 그들이 가까워질 수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뮤직비디오만큼이나 서로 비슷한 점이 참으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성별과 국가만 다를 뿐 이들이 가진 특별한 재능 때문에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작곡하고 부르는 천재 싱어송라이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 서로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천재적인 음악 재능으로 척척 들어맞는 케미 덕에 금세 마음을 열었고 더욱히 테일러 스위프트 투어에 참여한 관계자들과도 금세 친해져서 어울리는 에드 시런의 유쾌한 모습에 테일러는 에드가 더 큰 무대에서 빛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제이미 폭스의 만남이 미국 시장에 닫힌 문을 열게 된 계기였다면 테일러 스위프트와의 만남은 열린 문을 활짝 열게 된 계기가 되었죠. 에드시런은 테일러 스위프트에 대한 감사를 늘 아끼지 않았고 둘은 서로가 힘들 때마다 지지해주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2011년 1집 앨범 플러스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에드는 더 많은 음악을 만드는데 몰두했습니다. 다음 앨범을 위해 120곡 이상의 곡을 작업했고 그중 단 12곡을 추려 두 번째 앨범 멀티플라이를 3년 뒤인 2014년 발매하게 되는데요. 

유케이 앨범 차트 1위 데뷔 이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기록 등 역시나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이 앨범에서 나온 싱킹 아웃 라우드라는 곡이 빌보드 2위에 올라 1위 탈원을 계속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브루노 마스의 업타운 펑크 활약에 밀려 실패하게 되죠. 다음 해에는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올라 아쉽게도 수상 탈락했지만, 영국 브릿 어워드에서 샘 스미스를 제치고 최우수 남자 솔로 및 최우수 앨범상을 받으며 아쉬움을 달랬고 9만 명을 수용 가능한 영국 멤블리 스타디움에서 3일 연속 진행된 공연을 전석 매진시킬 만큼 그는 어느덧 영국에서 가장 핫한 남자 뮤지션이 되었는데요. 특히 그는 루프스테이션 이라는 장르 장비를 자주 사용하는데 특정 멜로디를 저장 후 재생하며 음을 쌓아나가는 방식을 통해 그의 보컬 기타 연주 그루브한 멜로디를 얻는 독창성을 발휘해 밴드가 필요없는 가수 원맨 밴드 가수로도 불리게 되었죠. 


이런 그의 인기는 영국 미국을 넘어 한국으로까지 번지게 되는데 10대부터 10대부터 터 성공을 향해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온 에드 시런 그는 자국 영국과 미국에서도 인정하는 명실상부 슈퍼스타가 됐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2015년 말 돌연 핸드폰 이메일 SNS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아쉬워하는 팬들에게 뒤이어나올 3집이 최고 수가 될 것임을 예고하며 여행을 다니며 지금까지 놓친 것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요. 이 기간 전후로 그는 어린시절의 사랑 체리시본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어린시절 에드시런과 학교 동창으로 필드 아키 선수로 뛰었고 영국에서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일을 하고 있었죠. 졸업 이후에도 연락이 닿아 지난 몇 년간 알고 지냈던 둘은 2015년 에드 시런이 미국에서 투어를 하는 동안 잠시 만나게 됩니다. 미국에 서로 머물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던 7월의 어느 날 우연히 테일러 스위프터가 미국 로드아일랜드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에드 시러는 투어 후 파티에 갈 예정이었고 이 내용을 체리에게 문자로 알렸는데 그녀도 그날 그 지역에 있다는 답장을 해왔습니다. 에드는 테일러에게 옛 동창을 파티에 초대해도 되는지 물었고 이를 테일러가 흔쾌히 수락하자 이날의 만남은 이들의 운명적인 데이트가 되었죠. 

에드시런과 그의 연인 체리 시본 /에드 시런 인스타그램


연락과 만남을 이어오던 가운데 2016년 체리가 런던으로 복귀했고 에드는 작업 대신 서로의 관계를 위한 시간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그는 익숙했던 것들과 잠시 떨어져 체리와 여행을 떠났고 둘은 1년 간 여행하고 매일 함께 보내며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했죠. 한편, 그가 인생의 행복을 다시금 생각해보며 연예 활동을 한 이후 2017년 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3집 앨범을 공개하는데 영국 첫날 판매량이 자신의 전작을 넘어섬과 동시에 스트리밍 음악 재생 횟수 역대 최고기록 경신 영국 역대 남자 솔로 아티스트 최고 초반 판매량을 경신하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국 주간 싱글 차트에서 1곡도 빠짐없이 앨범 수록곡 16곡을 모조리 20위 안에 올려놓게 되는데요. 이게 3~4곡 4~5곡도 아니고 전곡에다가 100위도 아니고 20위 안에 다 꽂아 놓은 것이었죠. 거기에 전작 싱킹아웃 라우드가 만년 2위였던 포럼을 딛고 앨범 수록곡 쉐이프 오브 유와 퍼펙트가 빌보드 1위를 찍게 되죠. 

그의 노래 쉐이프 오브 유는 그래미상 2개 상을 수상하게 되고 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무려 약 51억 회로 역대 최다 조회수 3위 영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의 전자키트곡 Thinking out loud 역시 30억 회를 넘기며 세계에서 조회수 30억 회를 넘긴 뮤직비디오를 2개나 가진 유일한 가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본인의 곡 뿐 만 아니라 원 디렉션 테일러 스위프트, 저스틴 비버, 에미넴 등 여러 가수들의 곡을 작사 작곡하며 천재 싱어송 라이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어린 시절부터 쉼 없이 달려온 에드시런의 열정과 그 엄청난 기록들 그는 2017년 6월 5등급 대영제국 훈장 수훈자로 선정되면서 커리어의 화려한 정점을 찍었고 이제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 그리고 월드스타로 영국 팝의 현재이자 미래를 이끌어 나갈 셀럽으로 불리고 있습니다.